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란쌍 왕국 (문단 편집) === 전성기 === ||[[파일:Wat_Visoun,_Luang_Prabang_Laos_by_Louis_Delaporte.jpg|height=250]]||[[파일:16534693568_0cbaa73c5b.jpg|height=250]]|| ||왓 위쑨[* 위쑨 국왕이 세운 사찰의 모습이다.]||쎄타티랏 국왕의 동상|| 이후 즉위한 국왕들은 모두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다. 국왕들이 내치에 신경을 기울이면서 라오스의 문화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1500년부터 1520년까지 재위한 위쑨 국왕 시대에는 란쌍의 첫 고전문학이 집필되는 등 여러 문화적 업적들이 남았다. [[대승불교]]의 승려들과 사찰들을 중심으로 교육과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왕국 전역에 여러 사찰들과 장대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또한 비엔티안에 모셔져 있던 프라방 불상[* 라오스 최고로 신성한 불상. 83cm 정도의 크기로 입식 금제 부처상이다. ]을 수도인 루앙프라방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참고로 이 프라방 불상이 옮겨온 것을 기념해서 도시의 이름이 '루앙프라방'으로 바뀐 것이다. 이전까지의 이름은 '무앙 수아'였다. ] 위쑨 국왕의 뒤를 이어 연이어 즉위한 포티싸랏 국왕, 쎄타티랏 국왕 모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란쌍 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덕분에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왕국들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다. 1520년부터 1550년까지 라오스를 다스린 포티싸랏 국왕은 라오스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힌다. 포티싸랏 왕은 란나와 아유타야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안정적인 외교를 꾀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로 [[힌두교]], 정령 신앙 등을 억제하고 불교 진흥에 힘썼다. 포티싸랏 국왕은 궁정을 [[비엔티안]]을 옮겨서 베트남과 아유타야 왕국으로부터의 방어가 유리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남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하게 굳혔으며, 란나의 국왕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이자 란나의 공주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인 쎄타티랏을 란나의 국왕으로 임명하게 만듦으로써 란나 왕국을 사실상 집어삼켰다. 이때 란쌍 왕국이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면서 라오스 전통문화의 꽃을 피웠으니, 우리로 치면 [[태조(조선)|태조]]과 [[세종(조선)|세종]]을 합쳐놓은 정도의 성군인 셈. 그러나 포티싸랏은 1550년 경 수도인 루앙프라방에서 외교 사절을 접견하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떨어져 사망했다고 한다. 포티싸랏 국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쎄타티랏 국왕은 점점 커져만 가는 인근의 아유타야 왕국과 [[미얀마]]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란나를 다스리고 있던 쎄타티랏이 란쌍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하여 란나를 떠나 루앙프라방으로 향하자 쎄타티랏에 불만을 품고 있던 란나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갔다. 이후 쎄타티랏 국왕은 란나를 되찾기 위하여 군사적 원정을 펼치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란나 왕국을 완전하게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란나 왕국은 미얀마 따웅우 왕조의 봉신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쎄타티랏 국왕은 1560년에 수도를 공식적으로 루앙프라방으로부터 비엔티안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란쌍 왕국은 무려 250년 만에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쎄타티랏 국왕은 수도를 천도하면서 대규모 건설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거대한 궁궐들을 세웠으며 란나의 [[치앙마이]]에서 옮겨온 에메랄드 불상[* 현재 [[태국]]의 왓 프라깨우에 있는 그 불상 맞다. 당시에도 이미 동남아에서 유명할 정도로 신성한 불상이었다.]을 보관하기 위하여 사찰을 개축했다. 그러나 이후 미얀마의 최강국인 [[따웅우 왕조]]가 1570년에 쳐들어오면서 란쌍 왕국은 위기에 처한다. 당시 미얀마의 봉신국이던 아유타야 왕국은 미얀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란쌍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란쌍 왕국이 이에 응하면서 아유타야 왕국과 함께 미얀마를 기습공격한 것이다. 미얀마 군대는 빠른 속도로 아유타야 왕국을 무너뜨린 후 란쌍 왕국에게 반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대는 란쌍이 다스리고 있던 [[치앙마이]]를 함락하고 란쌍 왕국을 몰아붙였다. 워낙 압도적인 따웅우 왕조의 군사력으로 인하여 란쌍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결국에는 수도인 비엔티안마저 버리고 도주하는 수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비엔티안을 함락한 미얀마 군대는 왕궁을 불태우고 왕자들을 미얀마로 끌고갔다. 쎄티타랏 국왕은 수도를 버린 후 게릴라 전술과 청야 전술 등을 피면서 따웅우 왕조의 군대를 필사적으로 막아냈고, 결국 미얀마군은 전염병과 식량 부족 등의 이유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